언제 케테 콜비츠를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득 '케테 콜비츠'란 이름이 주는 투박하고 거친 음절과 그녀의 작품이 생각날 때가 있다.
케테 콜비츠는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조각가이다.
1867년 오늘날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된 동프로이센의 주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했고 1945년 모리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급진적 사회민주주의자인 건축업자 카를 슈미트와 프러시아 개신교 신학자의 딸 카테리나 슈미트 사이에서 다섯번째 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그림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당시 프로이센에는 여성의 입학을 허락하는 대학이나 아카데미가 없었으므로 베를린에 있는 여성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사회성이 강한 클링거의 에칭 작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케테 콜비츠는 빈민구호를 하던 의사 카를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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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단순하고 솔직한 삶이 이끌어 주는 것들에서 주제를 골랐다.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 브루주아의 모습에는 흥미가 없었고, 중산층의 삶은 모든 게 현학적으로만 보였다. 그에 반해, 프롤레타리아에겐 뚝심이 있었다. …… 언젠가 한 여성이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왔을 때 나는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프롤레타리아의 숙명과 삶의 모든 것에 얽힌 것들이 나를 강렬하게 움직이게 하였다. …… 그러나 그 무엇보다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이끌린 이유 가운데 동정심은 아주 작은 것일 뿐이며, 그들의 삶이 보여주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 <Works in Color> Tom Fecht 중에서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들>을 주제로 제작한 판화 연작이 베를린 살롱에 출품되어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모두 여섯 개의 작품으로 제작되었는데, 1844년 실레시아에서 있었던 직조공들의 봉기와 그 실패를 다룬 이야기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금상을 수여하려고 했으나 프로이센 정부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수상 취소의 이유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거나 달래주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자연주의적 표현기법' 이었기 때문이었다.
<농민전쟁>은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제작된 대형 연속판화이다.
1525년경 일어났던 독일 농민전쟁이 배경으로, 혁명을 선동한 '검은 안나'라는 여성농민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의 줄거리를 구상했다. 이 작품은 원작이 있는 <직조공들>과는 달리 콜비츠가 직접 구상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1914년 아들 페터의 전사소식을 들은 케테 콜비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콜비츠는 자신의 작품에 대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담아왔으나, 자식의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서
과연 전쟁에서 고귀한 희생이란 것이 있는가 하는 회의가 생긴 것이다.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부터 전쟁의 참화를 판화에 표현하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연작 판화 <전쟁>을 완성했다.
1932년 나치는 박물관에서 콜비츠의 작품들을 철거했지만 '어머니와 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잘라내어 자신들의 프로파간다에 사용했다. 30년대에 그녀는 <죽음>연작을 작업했고 게슈타포가 반 나치활동 혐의로 조사했지만 국제적 명성 덕분에 구속되지 않았다.
전쟁의 격화로 살던 집은 불에 타 많은 작품도 함께 타버렸다. 그녀는 베를린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고 전쟁이 끝나기 16일 전인 1945년 4월 22일 사망했다.
80년대 학생운동 뒷편엔 이와 비슷한 풍의 목판화 그림이 많이 걸려있었다.
뭔가 암울한 힘이 내재된 느낌이었다.
실제로 케테 콜비츠의 그림은 민중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작품은 독일 베를린 노이에 바헤(새로운 경비) 건물에 전시되어 있다.
이 건물의 유일한 전시물인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피에타)' 조각상 앞에는 독일어로 "전쟁과 압제의 희생자들을 위하여"라고 씌여있다.
이 괴롭고 슬픈 조각상의 느낌은 사진만으로도 매우 강렬해서
만약 가까이서 본다면 눈물이 날 지도 모르겠다.
1942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손자인 페터마저 전사했다.
마지막 작품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속에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두 팔로 감싸 안아 전쟁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단호한 의지가 역력하다.
케테 콜비츠는 마지막까지도 '본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 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 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 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나갔다.”(1944.7월)
*출처 :위키피디아, 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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