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빈의 질투, 그리고 열등감
"들어봐요, 나는 질투하고 있는 게 아냐. 질투 따위는 할 수도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소. 도저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잘 말할 순 없지만 아무튼 그것은 무서운 일이야...... 난 질투하는 게 아니오. 그러나 남이 그런 눈빛으로 당신을 본다거나 당신을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모욕을 느끼고 굴욕스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오......"(p.53)
레빈의 집을 방문한 바세니카 베슬로프스키는 젊고 매력이 넘치는 사내이다.
저녁 만찬자리에서 키티의 옆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베슬로프스키의 태도에 레빈은 분노하며 키티에게 화를 쏟아낸다.
레빈의 화는 단순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열등감으로 비쳐진다.
부인 키티가 자기보다 잘난 브론스키의 연인이었던 과거의 상처가 때때로 레빈의 현재를 괴롭히는듯 하다.
불평등의 원칙
"부정한 수단, 교활한 방법에 의한 이득은," 레빈은 옳고 그름의 경계를 분명히 규정할 권위가 자기에게 없음을 느끼면서도 말했다. "말하자면 은행의 이득과 같은 것은" 하고 그는 계속했다. "그것은 악이야. 노력 없이 수만의 부를 획득한다는 것은 징세대리권의 경우와 마찬가지이고 그저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야. '국왕은 갔도다. 그러나 다른 왕은 건재한다'와 같은 논리야! 즉, 겨우 징세대리권이 폐지되자마자 재빨리 철도며 은행이 나타난 거야. 마찬가지로 노력이 들지 않는 돈벌이가 말야."(p.79)
레빈은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와 논쟁을 벌인다.
육체적인 노동 없이 얻는 이익은 악이라고 비판하며, 레빈은 불로소득의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자신 역시 상속받은 재산으로 살아가는 귀족으로서, 종일 노동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50루블을 받는동안 사냥을 하거나 쓸데없는 소일거리로 삶을 유지하는 귀족은 5천루블을 받는 것에 대한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다.
레빈은 그야말로 양심이 살아있는 귀족이다.
"자네가 만일 불평등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째서 자네는 평등을 실행하지 않는 거지?"
"난 소극적이긴 하지만 실행은 하고 있어. 나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위의 격차가 더이상 커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지."
"아니, 미안하지만 그것은 궤변이라는 거야."(p.81)
"그건 그렇고 이봐! 말하자면 현재의 사회제도를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든가, 혹은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가 부정한 특권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만족스럽게 그것을 이용하든가, 이 둘 중 하나를 취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
"아니, 그렇게는 안 돼. 만약 그것이 부정한 이익이라면 자네도 만족스럽게 이용할 수는 없을 거야. 적어도 나는 할 수 없어. 나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니까."(p.83)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와 베슬로프스키는 레빈의 '소극적 실행'이라는 말이 궤변이라며 공격한다.
사회제도 안에서 적법한 이득을 취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의 말은 일견 일리있어보인다.
레빈이 불편을 느끼는 지점은, 적법한 제도가 일방적으로 한 쪽-귀족-에만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레빈이 농민에게 보이는 이 감정은 막연하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인 역시 귀족으로서 누리는 모든 이득을 한꺼번에 내려놓을 용기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레빈의 태도는 사회의 부조리에 분통을 터뜨리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용기없는 지식인의 초상이 아닐까 한다.
속물이 될 것인가
돈을 얻기 위해 치른 노력이 그 돈으로 사들인 것이 주는 만족과 비등한가 어떤가 하는 생각, 그러한 생각은 벌써 오래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p.249)
키티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도시생활을 하게 된 레빈은 시골에서라면 치르지 않아도 될 많은 지출을 감당하면서 가식적인 귀족들의 사교모임에 점점 익숙해져간다.
유달리 겸손한 인간으로 여겨지고 싶다거나 겸손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완전히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스스로를 낮추는 리보프의 태도에 그는 언제나처럼 감동했다.(p.259)
그동안 고상하고 잘난척하며 허세를 부리는 귀족들에게 익숙해 있던 레빈은 손윗동서인 리보프의 겸손한 태도에 감동한다.
"요즘은 부모가 자기 생활을 가져서는 안 되고 그저 무엇이든 자식들을 위하도록 돼 있으니 말예요."(p.262)
리보프의 아내인 키티 언니의 말을 보면 자식을 키우는 마음과 방식이 백년 전의 러시아 부모들이나 현재 한국의 부모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 어떤가, 우리의 안일의 전당은 마음에 들었겠지?" 공작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아, 슬슬 한번 돌아볼까."
"나도 실은 여기저기 구경 삼아 한번 거닐고 싶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래, 자네에겐 재미있을 거야. 하지만 내 재미는 자네완 또 달라. 저기 보게. 저기 오고 있는 저런 늙은이는 말이야" 그는 부드러운 장화를 신은 발을 가까스로 옮기면서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입술이 축 처지고 허리가 굽은 클럽 회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자넨 저 사람을 보고 태어나면서부터 저런 쉴류피크였다고 생각할 거야."
"쉴류피크가 뭡니까?"
"허, 자넨 이 명칭을 모르는 모양이군. 이 클럽의 은어야. 자넨 달걀 굴리기를 알지? 그걸 너무 오랫동안 굴리고 있으면 쉴류피크가 되어버려. 우리 동료들도 그와 마찬가지야. 클럽에만 쫓아다니다보면 결국엔 쉴류피크가 되어버리는 거야. 자넨 그렇게 웃고 있지만, 우리 패들은 이젠 자기가 언제 쉴류피크가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지. 자넨 체첸스키 공작을 알고 있나?" 공작은 물었다. 레빈은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가 무너가 우스운 얘기를 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아니요, 모릅니다"
"어허, 이런 일도 있나! 체첸스키 공작은 아주 유명한 인물인데. 아니, 그런 건 어쨌든 괜찮아. 그 공작은 일 년 내내 공을 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어. 그런데 그 역시 삼 년 전까지는 쉴류피크 패가 아니라고 호언장담했었어. 오히려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쉴류피크라고 부르면서 말이야.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그가 클럽에 찾아왔는데 우리 문지기가 말이야......자네도 알고 있지, 바실리를? 왜 그 뚱뚱한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은 대단한 익살꾼이라네. 그런데 말이야. 체첸스키 공작이 그 녀석에게 이렇게 물었단 말이야. '어때, 바실리, 누구누구 와 있나? 쉴류피크 패들은 와 있나?' 하고 말이지. 그러자 그 녁석이 그에게 한다는 말이 '나리가 세번째입니다' 한 거야. 정말, 이거 봐,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p.278)
나는 타락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난 그들과 달라.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과 한패가 되어버리는 유혹의 세계.
레빈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과 한 패가 되어 쉴류피크가 될 것인가.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그이를 무신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누구에게나 심지어 갓난애한테까지도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그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후하지만 자기에게는 참으로 박한 사람이다. (...) 그 사람의 신세를 지고 있다. 게다가 또 많은 농부들이 마치 그 사람이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날마다 그 사람한테 몰려오고 있다.'
'그래, 그저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어라.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p.463)
키티는 갓태어난 아들 미티아에게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세상의 아버지라면 누구나 다 부러울 장면이다.
가족의 진심어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남자, 레빈은 좋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그저 자기의 욕심만으로 살고 있고, 미타우하 같은 놈은 그런 치입니다만, 그저 제 배때기에다 처쟁이는 짓만 하고 있습죠. 그런데 포카니치는 성실한 늙은이입죠.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p.479)
레빈은 농부 표드르가 한 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지난 날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지만
그 자신이 왜 사는지, 무엇때문에 살아가는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농부 표드르의 무심한 이 말 한마디로 레빈은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값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통렬하게 인식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기적을 찾아다니며 나를 납득하게 할 기적을 만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가능한 기적, 끊임없이 존재하고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기적을 나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p.482)
'나는 아무것도 들춰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알고 있던 것을 의식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과거에 나에게 생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이처럼 생명을 주고 있는 그 힘을 이해한 것이다. 나는 허위에서 해방되어 주인을 인식한 것이다.'(p.483)
해답은 삶 자체로, 선악을 식별하는 나의 지식 속에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식을 무엇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p.485)
사람은 왜 사는가.
톨스토이는 바로 '삶'이 해답이라고 얘기한다.
삶 속에 기적이 존재하고 삶 자체가 존재의 의미이며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내 안의 신을 따라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멀고 먼 길을 돌아와 깨달은 것은 진리는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 안에, 나의 삶 속에 삶의 목적과 의미가 내재해 있고
그것을 발견하든 아니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
행복한 삶이든 불행한 삶이든 자신의 삶 속에 해답이 있다.
해바라기처럼 브론스키의 사랑만을 갈구하던 안나의 삶은 비극으로 끝이 났다.
브론스키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등지고 타인을 향한 허망한 정열을 간직한 채
진정한 삶의 의미를 돌아볼 기회를 가져보지 못하고 자신을 버리고 만 안나가 참으로 안타깝다.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을 남에게 주어버렸을 때, 인간은 '안나'처럼 불안하다. 초라하다.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삶을 잠시 경험하는 것일 뿐
그 가식적이고 일회적인 연극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써 가며
자신의 본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다.
두렵기 때문이다.
비극이다.
반면 키티는 어떠한가.
키티는 차츰차츰 삶에서 중요한 것들, 배려, 공감, 연민, 감사, 사랑....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간다.
주변인으로 치장된 화려한 삶보다
진정한 사랑으로 채워진 삶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배운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누구인가...
살아가는 자라면 의문을 품어야 하며
스스로 해답을 구하고 그 속에서 자유를 느껴야 한다.
남을 향한 시선을 거뒤들여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게 삶이고 그게 행복이다.
이것이 바로 1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삶 자체가 바로 해답이다.
용어정리
*쉴류피크: 맛이 간 구닥다리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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