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1877~1962)
헤르만 헤세는 동양 사상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개신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외삼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자로 불교 연구의 권위자였다.
14살의 헤르만 헤세는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신경쇠약증과 부적응으로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며 학교를 나온다.
그리고는 김나지움에 입학하지만 16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만다.
그 후 2년간 시계 부품 점원으로 일하며 방황하다가
서점 점원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글쓰기를 하며 삶의 안정을 찾아간다.
이후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펴낸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헤르만 헤세는
칼 융의 제자 요제프 랑 박사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지만
아내의 정신분열 증세와 아들 마르틴의 질병은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아간다.
1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유럽 전체를 뒤흔들던 시기에
헤세는 독일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 팸플릿을 펴내며 우파 정치인으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한다.
<데미안>은 이 격랑의 시기에 탄생한다.
산업화와 전쟁으로 이전 시대의 가치가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서구사회의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헤세의 이야기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나치 치하에 금서였던 그의 작품들은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재출간되고
헤세는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향년 85세를 일기로 스위스에서 영면한다.
그의 저서로는
페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아래서, 인도에서, 크눌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동방순례, 유리알 유희 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확고함으로 근본적인 것을 건드린다'
라고 했던 알프레트 되블린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곱씹어 읽을수록
자꾸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 건드려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 누구나 인간이 되라고 던진 자연의 내던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기원, 그 어머니들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하지만 깊은 심연에서 밖으로 내던져진 하나의 시도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p.9)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대체 무엇을 향하고 있는걸까.
모든 사람의 삶이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니...
<데미안>의 이 구절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던 일상의 평온함을 뒤흔들며
내가 살아왔던, 살아가고 있는, 살아갈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고 넘어간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자기 삶의 요구와 주변 세계가 가장 심하게 갈등하는 지점,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장 힘들게 쟁취해야 하는 삶의 지점이다. 어린 시절이 물러지면서 천천히 붕괴하는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우리의 운명인 죽음과 재탄생을 경험한다. (...)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낭떠러지에 영원히 매달려 있고, 평생 동안 고통스럽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달라붙어 있다.(p.61)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파도에 휩쓸려 정신 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 곳에는 놀랍게도 재탄생이라는 삶의 신비로운 가르침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고통에 매몰되어
배움의 기회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가르침을 뒤로 한 채 고통만을 기억한다.
그 소원이 내 안에 온전히 들어 있어야만, 정말로 내 존재 전체가 그 소원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만 그걸 강력히 원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거야. 정말 그런 경우라면, 그러니까 네 내면으로부터 막을 수없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시도하면, 그건 이루어진다. 네 의지를 순한 말처럼 부릴 수 있는 거야.(p.70)
내 존재 전체가 그 소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타인의 바람이나 기대를 채우려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내 소원의 발현이자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려는 노력이다.
나의 의지란 것이 순수하게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자신의 여러모습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이런 나의 의지를 깊은 내면의 '나'가 순한 말처럼 부리게 하려면
우선 내 안의 진정한 '나'부터 만나봐야 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p.115)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성을 부수어야만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삶을 가두는 것은 사회일까, 아니면 나 자신일까.
우리가 어떤 인간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 (p.136)
내가 보는 것들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 안에 잠재하는 본성이 나와 닮은 것을 만날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감정으로 발현한다.
기쁨으로, 희망으로, 두려움으로, 때론 슬픔으로.
그것을 우리는 '투사'라고 부른다.
그래도 그 또한 내게 보내졌음을,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그에게서 두 배가 되어 내게로 왔음을, 그도 역시 내게 길을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길 자체임을 느꼈다. (p.147)
싱클레어는 깨달았다.
어떤 인연도 어떤 경험도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한 순간의 인연은 그 순간에 꼭 필요한 인연이요,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인연이라는 것을 말이다.
싱클레어의 길 위에 데미안이, 그리고 피스토리우스와 크나우어가 있었듯이, 지금의 내 모습은 무수한 사람들과의 인연의 결과요 수많은 경험치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음이 날카로운 불꽃처럼 갑자기 나를 불태웠다. 각자에게 '직분'이 주어져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직접 그것을 고르거나 고쳐 쓰거나 멋대로 지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p.153)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나'를 탐색하고 '나'의 길을 더듬어 가는 소명을 가진 존재이다.
수없이 많은 갈등과 삶의 우회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 '나'로 살아가는 것, 즉 '나'를 찾는 일 말고는 더 중요한 어떤 의무도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아닐 때만 두려움을 갖는 법이야.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어디서나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저 과거에서만 찾았다. (p.163)
내가 '나'를 모를 때 세상은 두려운 것이다.
나의 자유와 행복은 이미 내 안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내 것이 아닌 양 먼 곳에서 '나'를 찾고 있다.
'나'를 들여다 보라.
'나'를 발견하라.
그래서 나의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내라.
'나'가 내 삶에 자유와 행복을 허락할 때 비로소 그것들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빛나는 색채를 잃어버린 것이 어린 시절의 상실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고, 또 이런 고운 광채를 포기해야만 영혼의 자유와 어른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제야 나는 이 모든 것이 그냥 파묻힌 채 어두워져 있었을 뿐임을 알고 황홀해졌다. 자유롭게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행복을 포기하고 나서도 여전히 빛나는 세상을 볼 수 있고, 어린이처럼 바라볼 때 느끼는 내면의 전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p.167)
어른이 되면 아이 시절에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던 빛나는 시간들을 허물 벗듯 벗어버려야만 하는 줄 알았다.
모두들 그랬었다.
어린 시절과 어른의 삶은 단절되는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 순수했던 시절의 기쁨을 맛볼 수 없으며 거친 세상에 길들여져야만 하는 줄 알았다.
인생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 고난의 삶이 기다리는 가시밭길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흔히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인생이라고들 얘기했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고요의 순간.
내 안에는 내가 오랫동안 잊고있던 '나'가 있었다.
펼쳐본 지 오래된 사진처럼 뿌옇게 추억하는 나의 참모습 말이다.
축축해진 눈으로 내 그림을 보면서 나 자신을 읽었다. (p.167)
붕대를 감는 과정은 아팠다. 그 후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하지만 내가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나 자신 안으로 완전히 내려가면 그곳 어두운 거울에서 운명의 모습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럼 나는 검은 거울 위로 그냥 몸을 숙여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 모습은 이제 완전히 그와 같았다. 내 친구이며 길 안내자인 그 사람과. (P.199)
헤르만 헤세가 걸었던 자기자신으로의 여행 이야기는 해피엔드이다. 그가 삶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의지를 보일 때마다 삶은 기적처럼 새로운 길을 안내했고 그 길 끝에는 결국 진정한 '나'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정은 자기기만과 절망, 외로움, 두려움 등과 같은 고난이 친구처럼 따라다니며 고통을 주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학교 도덕시간에 듣던 자기성찰을 말하는건가.
인생의 교착점을 마주했을 때, 끝도 없는 번민과 후회로 점철된 시간들을 보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나를 재단하지만 쉽게 결론에 이를 수 없는 그 난해한 작업. 말이다.
싱클레어는 십대시절의 경험을 돌아보며 자신의 변화와 성숙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넘어 더 깊은 나를, 더 나은 나를 발견하려 노력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작은 애벌레고치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비관하지 않고 언젠가 나비가 될 것을 아는 것.
미운 오리새끼라고 놀려대어도 자신 안에 백조의 우아한 자태가 숨겨져 있음을 아는 것.
나는 우주의 일부분이고 내 안에 또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말한 인생의 사명에 공감한다.
아직은 어둠 속에서 먼지로 뒤덮여있는 내 안의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나를 성찰하고 '나'를 알아가려는 노력은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단 하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존재와 삶의 의미이다.
헤세의 <데미안>은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청소년기 뿐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해가고 있는 불안한 인간을 위한 다정한 지침서와도 같은 소설이다.
십년 후,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또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지...성장을 기대한다.
*출처: <데미안> 헤르만 헤세/안인희 옮김 - 열린책들, 위키피디아, 방탄소년단 Wings Short Film #7 Awake
'책꽃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너 쿤체 < 두 사람 > (0) | 2019.07.09 |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Metamorphoses) (0) | 2019.07.05 |
브라이언 와이스 <파워 오브 러브> (0) | 2019.07.03 |
헤로도토스 <역사> #2 (0) | 2019.07.01 |
헤로도토스 <역사> #1 (0) | 2019.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