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대략 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25년경)
헤로도토스는 서양세계의 최초의 역사가이자 '역사의 아버지'이며 최초의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기원전 485년경 그리스 문화권인 아시아 서남부 카리아 지방의 할리카르낫소스 시에서 태어났으며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와 친교를 맺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였던 헤로도토스는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시가(詩歌)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다.
그림의 맨 위에 헤로도토스가 있고 그 아래로 비교적 익숙한 이름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기둥처럼 자리하고 양측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가 있다. 서양 지성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의 위상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직접 보고 듣고 탐구한 내용을 쓴 것이다"
그의 저서 <역사>는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페르시아전쟁 : B.C.499~B.C.450)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역사'는 원래 그리스어로 ἱστορίαι인데,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역사> 는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간혹 낯선 이름과 지명들로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잔혹하거나 지금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풍습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 책은 황당하고도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기술한 '헬라스인들과 비 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은 유럽 중심의 역사가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책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문명의 기원은 비 헬라스인들이라고 말이다.
이 책 <역사> 는 다음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 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 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헬라스인이란 고대 그리스인을 지칭하며 비헬라스인은 페르시아, 이집트 등 고대 그리스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인상깊었던 에피소드 몇가지를 인용해 본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크로이소스 왕은 당대의 석학인 솔론을 초대하여 자신의 부와 성공을 뽐내며 누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를 물었다. 크로이소스 왕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당연히 자신일 것이라 즐거이 상상했지만 솔론의 대답은 크로이소스 왕을 당황시키고 말았다.
크로이소스 전하, 전하께서는 제게 인간사에 관해 물으시지만, 저는 신께서 매우 시기심이 많으시고 변덕스러우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이다....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고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눈여겨보아야 하옵니다.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p.44)
자신의 눈부시게 빛나는 성공과 행복이 한갓 운에 불과하고, 죽기 전까지는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파멸을 당할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이 말에 크게 화가 난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냉담하게 쫓아버리고 만다.
운명이었을까.
크로이소스는 이후 일어난 전쟁에서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고, 영원불멸할 것 같던 자신의 왕국을 페르시아의 왕 퀴로스에게 넘기게 된다. 드높은 신분에서 복속된 나라의 책사로 전락해버린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깨닫게 된 솔론의 지혜를 퀴로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전하 자신과 전하의 신하들이 한갓 인간임을 알고 계신다면, 전하께서 맨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은 인간사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같은 사람들이 늘 행복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옵니다. (p.152)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헤로도토스의 창작품이라고 말한다. 자세히 보면 크로이소스와 솔론의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헤로도토스의 행복론은 의미심장하다.
인생에는 부침이 있기 마련이고, 그 진행과정에서 누구도 절대행복과 절대불행을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술의 힘
페르시아인들은 술을 몹시 좋아하지만 남이 보는 앞에서 구토나 방뇨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들은 엄격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안건을 술에 취해 토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다음날 술이 깨면 회의장으로 사용된 집의 주인이 그 건을 다시 상정한다. 그리고 술이 깨어서도 동의하면 결정된 바를 실행에 옮기고, 그렇지 않을 경우 폐기한다. 또한 맑은 정신으로 미리 상의한 것은 술 취한 상태에서 다시 논의한다. (p.110)
페르시아인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을 온전한 것으로 보고 깨어서도 같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그 안건을 폐기하기까지 했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켜 온전한 의사결정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통념인데 반해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술에 대한 태도는 기괴해보이기까지 한다.
주목할 부분은 술취한 이가 남이 보는 앞에서 구토나 방뇨하는 것에 대해 엄격하게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페르시아인들이 보기에 술은 올바른 결정을 위한 수단이지 방종의 도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는 기준, 즉 규범에는 시대와 사회의 구분없이 일관된 생각이 있고 변화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 때 그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과 판단을 한 것일까. 그 때 그 곳에서의 '술'의 위상은 지금 여기의 '술'과 다르다. 고대 페르시안들은 의식이 지배하는 상태보다는 술에 취한 상태, 즉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가 더 진리에 가깝다는 판단을 했다.
어쩌면 많은 가치들이 이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서서히 탈바꿈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의 시성 하피즈는 술을 ‘신의 이슬’과 ‘빛’으로, 혹은 ‘불타는 루비’와 ‘이성의 집’으로 표현하며, 취함에서 깨달음을 얻고 취한 눈에서 기쁨을 찾는다고 했다. 이런 '다름'에서 새로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신들의 이름과 축제 의식의 기원
거의 모든 신들의 이름이 아이귑토스에서 헬라스로 도입되었다. (P.192)
축제와 행렬과 제물 바치는 의식을 세상에서 맨 먼저 시작한 것은 아이귑토스인들이고, 헬라스인들은 이런 것들을 그들에게 배웠다. (p.197)
그리스 신화의 많은 신들이 이집트 신화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에서 행한 많은 축제와 의식들이 이집트인들의 것을 모방했다.
문명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전 시대에 존재했던 문명의 기반 위에서 옮겨지고 세대를 거듭해가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집대성된 것들이다.
아이귑토스의 아마시스 왕
아마시스는 사인이었을 때도 술과 농담을 좋아했고, 결코 진지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 마실 돈과 유흥비가 떨어지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하곤 했다. 그가 자기들의 재물을 훔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가 부인할 경우 신탁소가 있는 곳에서는 그를 신탁소로 끌고 가곤 했다. 그러면 그는 때로는 신탁에 의해 유죄가 인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죄를 벗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왕이 되자마자 그의 절도죄를 벗겨준 신들의 신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들 신들은 무가치하고 그들의 신탁은 거짓말이라 하여 그는 그 신전들에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유지비조차 대주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절도행위에 유죄를 인정한 신들은 진정한 신들이고 거짓 없는 신탁을 내린다 하여 극진히 모셨다. (p.265)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이익관계에 있는 사건과 사람들에게 냉혹하게 선을 긋지 못한다.
만약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런 공정하지 못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 나라의 발전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마시스 왕은 현명했다. 그의 공정한 태도로 백성들에게 일벌백계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였던가.
아마시스 왕 치세에는 아이귑토스 역사상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출처 : <역사> 헤로도토스/천병희 역 - 도서출판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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