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혼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이성적 혼은 자신을 보고,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을 원하는 대로 형상화하고, 자신에게 열려 있는 열매를 손수 수확하고-식물의 열매나 동물들에게 그와 유사한 것은 남들이 수확한다-인생의 종말이 어디서 닥치든 본래의 목표에 도달한다. 무용이나 연극 등의 예술에서는 어떤 방해가 생기면 상황 전체가 불완전해진다. 그와 달리 이성적 혼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그리고 어디쯤에서 중단되더라도 자신 앞에 놓여진 과제를 완전하고 흡족하게 수행하기에 "나는 내 몫을 다했다"고 말할 만하다.
나아가 이성적인 혼은 우주 전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허공을 두루 거닐며 우주의 형태를 규명하고 무한한 시간 속으로 뻗어나가 만물의 주기적 재생을 파악하고 고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성적인 혼은 우리 자손은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할 것이고 우리 조상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나이 마흔 된 사람이 약간의 이해력만 있다면 그 같음의 원칙에 따라 과거에 존재한 모든 것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을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성적인 혼의 또 다른 특성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와 겸손이며 어떤 것도 자신보다 더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법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합리적 이성과 정의의 이성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p175
철학을 하기에는 인생의 어떤 다른 상황보다도 지금 네가 놓여있는 상황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p178
이웃한 나뭇가지에서 베어진 나뭇가지는 나무 전체에서 베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인간도 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가면 공동체 전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뭇가지는 남이 베지만, 인간은 이웃을 미워하여 등을 돌림으로써 스스로 이웃과 자신을 분리한다. 인간은 그렇게 하고도 그와 동시에 공동체 전체에서 자신을 베어낸 것을 알지 못한다. 공동체를 만들어낸 제우스의 선물이 이런 상황에서도 남아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이웃한 가지와 함께 자라서 다시 전체를 완성하는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자주 반복되면 분리된 부분이 나머지 부분과 다시 결합하여 이전 상태로 복원되기가 어려워진다. 정원사가 무슨 말을 하든, 처음부터 나머지 부분과 함께 자라 함께 살아온 나뭇가지는 한 번 베어졌다가 다시 접목된 나뭇가지와 같지 않다. 함께 자라도 한마음은 아닌 것이다.
네가 올바른 이성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너를 올바른 행동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듯이, 너는 또 그들이 너에게서 그들에 대한 호의를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오히려 너는 이 두 가지 원칙을 한결같이 고수하라. 네 판단과 행동을 견지하고, 너를 방해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너를 화나게 하는 자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행동을 포기하고 겁이 나서 굴복하는 것 못지않은 나약함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주눅이 드는 자나, 본성적으로 친족이자 친구인 자를 혐오하는 자나 둘 다 똑같이 탈영병이다.
"어떤 자연도 기술에 뒤지지 않는다." 기술은 여러 가지 자연현상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경멸하면서 서로 아부하고, 서로 능가하기를 바라면서 서로 굽실댄다.
가장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은 혼 안에 내재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들은 꼼짝 않고 서 있는데, 그것들을 판단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해두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들이 자연에 맞는다면, 그것들을 즐겨라.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에 어긋난다면 네 본성에 맞는 것을 찾고,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네 본성에 맞는 것을 추구하라. 자신의 고유한 선을 찾는 자는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의견을 근절할 것인가? 어떤 모욕도 너에게 치욕을 안겨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능하다.
인간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그만큼 더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슬픔이 나약함의 표시이듯, 분노도 나약함의 표시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상처받고 항복하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이성이 빠지기 쉬운 네 가지 미로를 늘 경계해야 하며, 그 미로가 보인다면 매번 이렇게 말하며 당장 제거해야 한다. "이 생각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은 공동체를 해체할 수 있다. 네가 말하려는 것은 네 본심이 아니다." 본심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은 가장 부조리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므로. 네 번째 미로는 너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 안의 신적인 부분이 덜 존경스럽고 죽게 마련인 부분, 즉 육신과 육신의 조야한 의견들에 패배하고 굴복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퓌타고라스학파가 이르기를 새벽에 하늘을 쳐다보라고 했는데, 그것은 언제나 같은 궤도를 따라 같은 방법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는 천체뿐 아니라, 그 질서와 청정함과 적나라함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별을 가리는 베일은 없기 때문이다. p188
출처: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천병희역/숲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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