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6
우리가 낮에 하려고 했던 것이 실은 잠이 들면서 꿈에서만, 다시 말해 잠으로 굴절되면서 우리가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길을 따를 때라야만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 같은 이야기도 시간이 흐르면 다르게 끝난다. 어쨌든 우리가 잠자는 동안 체험하는 세계는 너무도 달라, 잠들기 힘든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 세계로부터 빠져나가려고 애쓴다. 여러 시간동안 두 눈을 감고, 눈 뜨고 있을 때와 비슷한 상념을 절망적으로 반복한 후에, 그들은 이전 순간이 논리적 법칙과 현재의 자명성과는 정확히 모순되는 추론의 무게 때문에 무거워졌으며, 이런 기억의 짧은 '부재'가 그들에게 이제 문을 열어, 어쩌면 그들이 그 문을 통해 조금 후면 현실의 지각에서 빠져나갈 수 있고, 현실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잠시 머무를 수 있으며 며, 또 이것이 얼마 동안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게 해 주리라는 의미임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용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 등을 돌리고, '자기 암시'가 마녀처럼 상상의 병 혹은 신경증 재발 같은 유해한 음식을 준비하여, 무의식적인 수면 동안 점차로 올라오는 발작이 잠을 중단할 정도로 심해져서는 그 발작이 시작될 시간만을 엿보는 동굴의 입구에 이르기만 해도 우리는 이미 큰 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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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는 잠자는 동안 마치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깊은 잠에 빠져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잠든 동안 그 활동이 두 배로 늘어나는 민첩한 식물성 힘이, 습사 님프들이 헤라클레서에게 젖을 먹이듯,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을 모두 소화하면서 과다하게 섭취한 무거운 몸을 잠시 후에 꺼내면 무척 행복해진다.
사람들은 이것을 납덩이 같은 잠이라고 부른다. 이런 잠이 끝난 후에 잠시 우리는 자신이 단순한 납 인형으로 변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자신의 생각이나 인성을 찾으면서 다른 것이 아닌 내 고유한 자아를 찾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왜 예전 인성이 아닌, 그와는 다른 인성이 마음속에서 구현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이 선택을 명하는지, 또 우리가 될 수 있었을 그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정확히 어젯밤에 나였던 자에게 그 선택의 손길이 갔는지 알지 못한다. 실제로 뭔가가 중단될 때(완전히 잠에 들었거나 혹은 우리 자신과 아주 다른 꿈을 꾸고 있을 때) 무엇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일까? 거기에는 심장이 고동을 멈추고, 그래서 일정 간격으로 혀를 잡아당기는 인공호흡법으로 소생시킬 때처럼 실제로 죽음이 있었다. 아마도 방은, 우리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한 방이라 할지라도 추억을 깨어나게 하며, 또 그 추억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추억이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우리가 의식하는 몇몇 추억이 우리 마음속에서 잠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깨어남에 따르는 부활은 - 우리가 잠이라고 부르는 정신 이상의 그 자비로운 발작 후에 - 요컨대 우리가 잊었던 이름이나 시구와 후렴구를 다시 떠올릴 때 일어나는 현상과도 흡사하리라. 그리고 사후 영혼의 부활 또한 어쩌면 기억의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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