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9
포부르생제르맹 사람들 중 4분의 3은 대부분의 부르주아들 눈에 도박으로 재산을 다 써서 없앤 방탕아들, 따라서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부르주아들은 이 점에서 지나치게들 순진해서 포부르생제르맹 사람들에게 약간의 결점이 있다 해도 이 결점이 최대의 경의와 더불어 그들이 초대받는 데, 부르주아 자신은 결코 초대받지 못할 자리에 초대받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포부르생제르맹 사람들은 부르주아가 초대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말할 때면 소박함을 가장하거나 특히 친구들 가운데 '가난뱅이'친구들에 대해 험담하듯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오해를 더 깊어지게 한다. 만약 우연히도 어느 상류사회 귀족이 매우 부유하고 재계의 중요한 회장직을 맡은 관계로 프티부르주아와 교제를 한다면, 귀족도 훌륭한 부르주아가 될 자격이 있음을 깨달은 부르주아는 그 귀족이 결코 도박으로 파산한 추작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며, 후작이 친절한 사람일수록 그런 교제를 더 피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부르주아는 대기업 이사회 회장인 공작이, 마치 어느 군주가 현직 공화국 대통령의 딸보다 폐위된 왕의 딸과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듯이, 프랑스에서 가장 오랜 가문인 도박꾼 후작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 걸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두 세계는 발베크만의 한쪽 끝에 위치한 바닷가 주민들이 또 다른 끝에 위치한 바닷가를 바라보듯이 서로를 허구적이고 거짓된 시각으로 보고 있다.
p.125
들판이나 도시에 어둠이 떨어지고 마차가 빨리 달리기만 하면, 고대의 대리석처럼 훼손된 여인의 상반신이, 달리는 속도나 그 모습을 뒤덮는 황혼 덕분에 각각의 길모퉁이나 상점 구석에서 틀림없이 우리 심장에 '아름다움'의 화살을 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아름다움이, 단지 이 세상에서 뭔가 그리움으로 고무된 우리의 상상력이 저 스쳐 가는 여인의 파편적이고 덧없는 모습에 덧붙인 보충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지 하고 가끔은 묻고 싶어진다.
만약 마차에서 내려 우리와 마주친 그 소녀에게 말을 걸 수만 있었다면, 나는 마차에서는 식별하지 못했던 피부의 어떤 결함을 보고 그녀에게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그러자 그녀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온갖 노력들이 갑자기 불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일련의 가정들로서 우리가 추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모습은 이미 미지의 세계로 열리는 길을 가로막으며 그 가정들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p128
어쩌면 어느 날엔가 내가 보다 자유로운 몸이 되는 날이 오면 다른 길에서 비슷한 소녀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력적으로 생각되는 여인 곁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지닌 그 배타적인 개별성을 이미 망가뜨리기 시작햇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욕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나 스스로가 암묵적으로나마 그 욕망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p131
눈에 보이지 않는 입술로 그녀 안에 있는 인간을 이제 막 건드렸으며 또 내가 그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렇게 강제로 빼앗는 이 비물질적 소유가 육체의 소유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신비로움을 지웠다.
콩브레 이후 자주 느껴보지 못한 깊은 행복감이, 그중에서도 마르탱빌 종탑이 내게 주었던 것과 유사한 행복감이 갑자기 날 가득 채웠다.
우리가 따라간 산등성이 길의 움푹 팬 곳에서, 나무로 뒤덮인 오솔길의 시작을 표시하는 듯한 세 그루 나무가 내게는 처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고, 나무들이 뚜렷이 드러난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으면서도 예전에 내게 친숙했던 장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정신은 어느 먼 옛날과 현재라는 시간 사이에서 비틀거렸고 발베크 근교가 흔들렸고 나는 우리의 이 모든 산책이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발베크는 내가 상상 속에서만 방문한 장소이고 빌파리지 부인은 소설 속 인물이며 고목 세 그루는 우리가 읽는 책에서 실제로 거기 옮겨졌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묘사하고 있어 우리가 책에서 눈을 들면 마주칠 현실이 아닐까 하고 물어보았다.
나는 세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들은 잘 보였지만, 내 정신이 포착하지 못하는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너무 멀리 있어 우리가 아무리 팔을 뻗고 손가락을 늘어뜨려도 이따금 그 덮개에만 잠깐 스칠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그런 물건처럼. 그때 우리는 보다 힘찬 도약으로 팔을 뻗고 더 멀리 닿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내 정신이 집중하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혼자 있어야 했다.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 갔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듯이 이번에도 얼마나 홀로 있고 싶었던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나는 사유 자체에 대한 노력을 요하는 어떤 종류의 기쁨을 인식했으며, 이 기쁨에 비하면 이런 기쁨을 포기하는 게으른 쾌감 같은 건 초라해 보였다. 이 기쁨은 대상이 무엇인지 예감은 하면서도 나 스스로 만들어 내야 했으며, 나는 이 기쁨을 아주 가끔씩만 느꼈고, 그러나 어쩌다 이런 체험을 할 때면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보여, 이 기쁨의 유일한 현실에만 매달리다 보면 마침내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 속에서 이중으로 보인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어쩌면 나무들은 신화의 출현, 즉 예언을 알려 주는 마녀들 또는 노르넨의 원무곡인지도 몰랐다.
나무들이 실망한 듯 팔을 흔들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자니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오늘 우리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은 앞으로도 결코 배울 수 없을 거야.
난 마치 친구를 잃은 듯, 나 스스로가 죽은 듯, 혹은 죽은 이를 부인하거나 신을 알아보지 못한 듯, 그저 슬프기만 했다.
p146
그렇게 해서 충직한 하인들을 집 안에 두게 된 거죠. 집에서 제일가는 사치품이니까요.
p149
할머니의 가르침이 없이는 누군가에 대한 존경심의 척도를 결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르넨: 노른(Norn)이라고도 하며, 복수(複數)로는 노르니르(Nornir)이다. 그리스 신화의 모이라에 해당한다. 첫째 우르드(과거), 둘째 언니 베르단디(현재), 막내 스쿨드(미래)의 세 자매로, 우주수(宇宙樹) 위그드라실의 뿌리 끝에 있는 우물에 살면서, 그 우물물을 위그드라실에 뿌려, 나무가 말라죽지 않도록 보살핀다. 신도 인간도 그녀들이 정하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민화 등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나와서 예언하는 무녀(巫女)는 그 후신으로, 근년까지만 해도 그런 종류의 무녀가 북구에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마녀도 노르넨이다.
*포부르생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 프랑스 귀족들의 주거지였던 호텔 파티큘리에가 모여있는 곳. 파리 7구에 속함. 초기 역사에서 포부르생제르맹은 생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서쪽에 위치한 파리의 교외 농업 지역이었다. 18세기에 들어 마레 중심부에 도시 저택(호텔 수비즈)을 짓던 프랑스 귀족들이 더 깨끗하고 인구가 적은 포부르로 이동했는데 이것이 귀족 사회에서 매우 유행이 되었고, 이로 인해 '르 포부르'라는 단어는 프랑스 귀족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Hôtel Matignon , Hôtel de Salm 또는 Hôtel Biron이 포부르생제르맹에 있는 대표적 건물이다.
*참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 마르셀 프루스트 저 / 김희영 역 / 민음사, 위키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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