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75
클레이스테네스는 재임 기간(B.C.508~507)에 놀라운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귀족 지도자들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고대 부족 체계를 완전히 재조직했다. 또 솔론의 400인회를 새로운 각 부족으로부터 선출하고 500인으로 확대했다. 구성원은 매년 중간 계급에서 선출했으며 평생 두 번만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대부분의 농민, 장인, 상인이 평생 언젠가는 500인회에서 봉사하여 완전히 새롭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시민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테네는 여전히 9명의 집정관이 다스렸다. 이들은 상층 계급에서 선출했으며 축제, 군대, 재판을 책임졌다. 귀족이 여전히 도시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500인회와 민회는 권력 남용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500인회는 한 달에 세 번 모였기 때문에 일반 농부나 상인은 500인회에서 일하는 동안 자기 시간의 10분의 1 정도를 정치에 바쳐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열의를 잃지 않았으며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기원전 5세기에 중간 계급은 회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아테네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시민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고 동기 부여를 받기만 하면 정부가 야만적인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오래된 제도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혁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체제를 이소노미아(isonomia: 평등한 질서)라고 불렀다.
진리는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진리는 정치 영역의 '중심에'(엔 메소이 en mesoi) 있었다.
p381
기원전 493년 아테네의 상당히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인 장군 테미스토클레스(524~460?)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자 아레오파고스 회의를 설득하여 함대를 건설했다.
이 결정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해전에 전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은 중무장 보병에 있었으며 이 부대가 그들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다. 그러나 원로회는 동의하고 항해 전문가들을 데려와 3단 노가 달린 군선(트라이림)을 200척 건조하고 해군 4만명을 훈련시켰다. 이것은 전통의 급격한 단절을 의미했다. 이전에는 오직 무장을 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남자만 중무장 보병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민이 아닌 사람을 포함한 모든 남성이 해군에 징집된 것이다. 귀족, 농부, 테테스, 즉 하층 계급 남자들이 똑같이 노 젓는 의자에 앉아 함께 노를 저어야 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아테네로 향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주민 전부를 소개하여 살라미스 섬으로 보냈다. 페르시아군은 텅 비어버린 아테네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노략질을 끝낸 뒤 살라미스로 건너온 페르시아군은 좁은 만에 배가 너무 많아 비좁은 곳에서 서로 엉켜 꼼짝하지 못했다. 아테네군은 이 배들을 하나씩 골라 공격했고 겨우 살아남은 페르시아 배들은 도망쳤고 크세르크세스는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티케를 떠났다.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리스인은 훈련받은 대로 이성을 활용하여 엄청난 제국을 물리쳤다. 만일 아테네 시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제거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테미스토클레스는 결코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p384
이제 아테네에서는 비극이 귀중한 제도가 되었다. 매년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폴리스가 비극을 무대에 올렸다. 극작가들은 종종 그즈음에 일어난 사건을 반영하는 주제를 선택했지만 보통 비극적인 배경 속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거리를 두고 당면한 문제를 분석하고 사유하게 했다. 축제는 공동체의 명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들의 문제와 곤경을 풀어나갔다.
그리스인은 늘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도움을 준 신화들을 극화할 때 과거의 확실성을 심문했으며 전통적인 절대적 가치들을 까다롭게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비극은 고난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이 두카라는 것,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틀린 것임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카타르시스는 공감과 자비를 경험하는 데서 얻을 수 있었다. 타자와 함께 느끼는 능력이 비극적 경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p.389
기원전 470년 폴리스들은 델로스 동맹이 폴리스들 간의 우애를 장려하려고 고안된 것이라기보다는 아테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로 해군의 중추가 된 하층 계급 테테스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적 관념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민회에서 자신들을 더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급진적인 정책이라도 지지하려 했다. .아테네는 다시 분열된 도시가 되었다.
아이스킬로스는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에서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찢어진 사회를 묘사했고 <오레스테이아>에서는 아테네가 데모크라티아(인민에 의한 정부)를 외치는 페리클레스 무리의 혁명으로 인해 얼마나 깊이 흔들렸는지 보여준다. <에우메니데스:마음씨 고운 자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에우메니데스가 엄숙한 폼페(pompe: 행렬)의 호위를 받아 새 신전으로 가는 장면을 통해 폴리스의 덕, 즉 대립하는 힘들의 균형과 절제가 승리를 거두지만 과거의 어두운 행위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제국은 덫이 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입으로는 자유를 떠들었지만 그리스 세계에서 억압적 세력으로 원성을 샀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확고한 믿음과 분명한 원칙이 어김없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필멸인 인간은 안티고네처럼 비극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하며, 노력을 할 만큼 다 한 뒤에는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데, 소포클레스는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암시한다.
*아레오파고스 회의: 고대 아테네에서 언덕에서 열린 일종의 원로회의.고대 그리스 초기에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집정관을 지낸 사람에게 의원 자격을 주었으며 한번 의원이 되면 종신직으로 유지되어싿. 초창기에는 귀족회의였으나 기원전 594년 솔론의 개혁 이후로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시민이면 누구나 집정관이 될 수 있었으므로 휘의의 구성과 권한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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